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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연고 장흥 산골서 67년째 제사…안중근의 서글픈 가족사

전남 장흥 해동사 앞에서 펄럭이는 태극기와 손바닥 탁본기. 약지가 짧은 손바닥 탁본 깃발에서 해동사가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사당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3월 2일 비밀결사 ‘단지회’를 조직하고 손가락을 잘라 이토 이로부미 암살을 맹세했다.

전남 장흥군 장동면 만년리 만수산 자락의 해동사(海東祠). 외진 산골의 이 사당에서 67년째 안중근(1879∼1910) 의사 추모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다시 말해 1955년부터 해마다 안중근 의사 제사를 지내고 있다. 놀랍고 궁금하다.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안중근 의사는 전남 장흥과 전혀 연고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슨 사연이 있어 무연고 남도 땅에서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67년째 제를 올릴까. 해동사는, 적어도 국내에선 유일하게 안중근 의사 제사를 지내는 장소다.  


핏줄은 질기다

장흥 만수사는 죽산 안씨 가문의 사당이다. 안향 선생을 비롯한 조상과 성현을 배향하는 공간에서 안중근 의사를 모시는 별도 사당 해동사를 두고 추모했다.

안중근 의사는 순흥 안씨다. 순흥은 경북 영주의 고장이다. 전남 장흥·강진·보성, 이웃한 남도의 세 고장에도 안씨가 모여 산다. 죽산 안씨다. 죽산 안씨는 순흥 안씨와 한 핏줄이다. 순흥 안씨 6대손에서 죽산 안씨가 갈라져 나왔다. 이들 죽산 안씨가 조상 제사에서 안중근 의사를 모셨다(죽산 안씨 제학공파 사인공종회 안동조(72) 회장).

1955년 죽산 안씨 가문의 유림 안홍천 선생이 안중근 의사 제사를 지내는 곳이 없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직계는 아니라도 뿌리는 같으니 안중근 의사를 모시자고 문중을 설득했고, 나라에도 알려야 할 것 같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간다. 죽산 안씨 유림의 뜻을 접한 이승만 대통령은 흔쾌히 친필 휘호를 써 준다. ‘해동명월(海東明月).’ 대한민국을 비추는 곳이라는 뜻이다(이승만 대통령과의 일화는 죽산 안씨 문중 기록에 전해온다). 해동사 현판에 이 글씨가 걸려 있다. 

해동사 현판에 걸린 ‘해동명월’이란 글씨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휘호라고 한다. 문창살 아래 태극 문양이 이 사당이 순국선열을 모신 장소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죽산 안씨 집안은 안중근 의사 유족에게도 허락을 받아낸다. 1955년 10월 유족이 참석한 가운데 영정과 위패 봉안식을 연다. 안중근 의사의 딸 안현생(1902∼1959)씨가 영정을, 5촌 조카 안춘생(1912∼2011)씨가 위패를 들고 죽산 안씨 문중 사당 만수사(萬壽祠)를 방문한다. 유족이 전달한 영정과 위패는 만수사 옆 작은 전각에 모신다. 그 전각이 해동사다. 죽산 안씨는 다른 조상처럼 안중근 의사도 시제(時祭) 때 함께 기린다. 그날이 3월 12일이다.


멈춰 선 시계 

해동사 제단에 놓인 안중근 의사 영정과 위패. 모두 유족이 직접 건넨 것이다. 위패 옆에 걸린 괘종시계가 9시 30분에 맞춰 서 있다.

현재 해동사는 만수사 아래에 따로 있다. 안중근 의사 서거 90주년이었던 2000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한 칸짜리 건물이 세 칸으로 넓어졌다. 출입문도 다르다.

해동사는 국가보훈처가 지정한 현충 시설이다. 하여 여느 사당과 분위기가 다르다. 해동사 앞에서 깃발 세 개가 펄럭인다. 태극기와 장흥군기 그리고 안중근 의사 손바닥 탁본기다. 약지가 짧은 예의 그 손바닥이다. 해동사 문창살 아래는 태극 문양이 장식하고, 해동사 안 제단은 안중근 의사 영정과 위패가 자리한다. 위패 오른쪽 벽에 걸린 낡은 괘종시계가 눈에 띈다. 바늘이 9시 30분에 멈춰 서 있다. 오전 9시 30분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시각이다(김미순(67) 장흥군 문화관광해설사). 

해동사 전경. 맞배지붕을 얹은 세 칸짜리 건물이다.

2020년은 안중근 의사 서거 110주년이었다. 장흥군청은 대대적인 안중근 의사 선양사업을 추진했었다. 우선 기일을 옮겼다. 문중 행사를 넘어 공식 추모제로 치르기 위해서였다. 새로 정한 날짜가 3월 26일이다. 1910년 이날 안중근 의사가 순국했다. 지난달 14일을 앞두고 SNS에서 안중근 의사 추모 캠페인이 벌어진 적이 있는데, 2월 14일은 안중근 의사 순국일이 아니라 사형 선고를 받은 날이다.

드론으로 촬영한 만수사와 해동사 전경. 왼쪽 아래 건물이 해동사다.

이제 안중근 의사 제례는 죽산 안씨 문중 행사이자 장흥군 추모행사다. 자격도 갖췄다. 예부터 장흥군수가 죽산 안씨 문중 시제에 참석했거니와 몇 해 전부터 제사 비용 일부도 냈다. 정종순 장흥군수는 “안타깝게도 작년 110주년 추모행사를 코로나 때문에 계획대로 치르지 못했다”며 “예산 70억 원을 확보해 추모공원을 조성하는 등 다양한 선양사업을 펼칠 예정”이라고 말했다. 장흥군에 조만간 들어설 기차역 이름도 ‘하얼빈 역’으로 생각해 놨단다. 올해 추모제 규모는 이번 주 회의에서 정한다.


불우한 가계 

해동사 앞에 세운 안내판. 1955년 안중근 의사 유족이 영정과 위패를 안고 행렬하는 장면을 담았다.

알려진 대로 안중근 의사는 “고국에 묻히고 싶다”고 유언했다. 그러나 유해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데 왜 제사도 못 지내고 있었을까. 여기엔 심란한 가족사가 숨어 있다. 

안중근 의사는 부인 김아려(김마리아·1878∼1946) 여사와 2남 1녀를 두었다. 1910년 하얼빈 의거 이후 유족은 긴 세월 중국을 떠돌며 어려운 생활을 했다. 장남 분도(1905∼1911)씨는 일곱 살 나이에 중국에서 급사했다. 독이 든 과자를 먹고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중국에서 근근이 살던 차남 준생(1907∼1952)씨는 끝내 일제의 회유에 넘어갔다. 1939년 10월 17일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신사 ‘박문사’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히로쿠니와 함께 참배하고 아버지 죄의 용서를 빌었다. 이후 유족은 일제의 보호를 받으며 생활했다. 장녀 현생(1902∼1959)씨도 막냇동생의 박문사 사죄를 지원했다고 알려진다. 준생씨가 1952년 부산에서 숨진 뒤 그의 가족은 미국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장흥 글·사진=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원문보기 https://news.joins.com/article/2400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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